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김성근/야구 스타일 (문단 편집) === 팀에 대한 강력한 장악력 === KBO에 이름을 남긴, 아니 스포츠계에 이름을 남긴 명감독들 대부분이 그렇지만, KBO 올드스쿨 감독 중에서도 김성근 감독은 김응용 감독과 함께 팀 장악력이 굉장히 뛰어난 감독으로 꼽힌다. 동시에 강한 카리스마로 약팀 특유의 사분오열하는 팀 분위기를 각종 훈련이나 기용 변화 등을 통해 휘어잡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태평양 시절 오대산 극기훈련. 극기훈련 자체는 본인 스스로도 "해서는 안 되는 훈련"이었다고 이야기하지만, 적어도 당시의 태평양 돌핀스 상황에서는 어느 정도 필요한 부분도 있었다. 당시 김성근 감독은 이에 대해 “당시 선수들 사이에 패배의식이 너무 뿌리깊었어. 또한 트레이드도 많고 팀도 어수선했지. 그 이전부터 인천팀에는 여기저기서 온 선수들로 구성되다보니 파벌이 심했어. 그래서 극한상황으로 내몰아 하나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야. 말 그대로 팀이라는 개념이지”라고 설명했다. 당시 태평양 돌핀스는 신생 팀 특유의 외인구단 성향이 강했는데,[* 이는 이후 쌍방울 레이더스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신생 팀들 중 구단 지원이 유달리 빠방했던 빙그레 이글스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다 한번씩은 거쳤던 과정이었다.] 당시 팀을 대표하는 베테랑 선수였던 [[김일권]], [[김윤환(1957)|김윤환]]이 해태에서 오는 등 타 구단 소속 선수들이 팀에서 밀려난 상태에서 모여든 팀으로 기존 인천 선수들과의 알력 싸움이 심하였다. 이에 김성근은 반발하는 선수들은 2군으로 보내겠다는 협박에 가까운 통보로 선수들의 반발을 억지로 무마했으며, 극기훈련 이후로도 지옥 훈련은 계속되었다. 당시 김성근 감독의 아메리칸 펑고 훈련이 너무 힘들었는데, 당시 김일권의 말에 의하면 똥물까지 게워냈다고. 당시 김일권은 김성근에게 "야 이 개xx야 쳐라!" 소리치고 김성근은 아랑곳하지 않고 "알았다 xx야"하면서 쉬지않고 타구를 날렸다는 일화가 전한다. 하지만 그런 훈련 결과 그 고집불통이던 김일권마저 휘어잡는 데 성공했고, 사실상 퇴물로 분류되던 김일권은 생애 첫 3할 타율을 기록하고 골든글러브를 수상하였으며, 1989 시즌 62개의 도루를 기록, 자신을 밀어낸 해태 이순철과의 도루 경쟁에서까지 승리하며 도루왕을 되찾아왔다. 반대의 방식으로 이런 능력을 보여준 건 LG 트윈스 시절. 당시 LG는 선수협 사태 당시 강경파였던 양준혁, 선수협 지지파였던 김재현, 온건파이다가 반대파로 돌아선 유지현 등 선수협과 관련된 주요 인사들이 하나로 모여 있었고, 이 문제를 두고 파벌 갈등이 심각한 수준이었다. 여기에 서용빈은 1999년 병역 비리 사태로 소송이 계속되는 상태에서 교통사고까지 이어지며 멘탈이 거의 날아간 수준이었다. 심지어 투수진조차도 노송 김용수의 반강제 은퇴 이후 팀이 뒤숭숭한 상황. 즉 팀 자체가 약한 팀은 분명 아닌데, 팀 분위기와 멘탈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무너져 있는 상태였다. 이를 위해 김성근이 선택한 것은 팀의 안정화였다. 그는 이들 모두를 포용하여 양준혁, 김재현, 유지현, 서용빈을 각각 포지션에 붙박이로 기용하고, 투수는 신윤호를 중심으로 재편하면서 안정시켰다. 다만 이처럼 장악력을 중요시하는 스타일이다보니 오히려 강팀에는 안 맞는 스타일이었다. 삼성은 김성근이 맡기 전에도 이미 우승을 다투는 팀이었고, 선수들 또한 팀에 대한 프라이드가 굉장히 강한 팀이었다.[* OB 베어스 또한 원년 우승 프리미엄이 있어서 이런 의식이 없지 않았지만, OB 시절에는 처음 시작부터 함께 했기 때문에 그런 경향이 나타나기 어려웠다.] 이런 팀에서 어디서 굴러들어온 감독, 심지어 OB 시절 앙숙이었던 감독이 갑자기 나타나 전체를 휘어잡으려 하는 상황은 결코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결국 류중일 등 베테랑 선수들의 항명 사태가 터져나왔고, 삼성 시절은 감독 커리어 중 흑역사로 남았다. 반대로 한화 시절에는 이런 장악력이 오히려 독이 된 케이스. 이 시점의 김성근은 아예 아무도 태클을 걸 수 없는 "야구의 신"으로 취급받는 시절이었고, 한화 구단 또한 전권을 넘겨준 상황이었다. 심지어 연배도 워낙 높다 보니 고집은 고집대로 늘어나고, 한참 제자인 코치진들이 직언하기도 어려워진 상황. 이런 상황 속에서 한화 시절의 운영이 막장으로 가도 그걸 막아설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나마 한국에서의 사제 관계로 엮여 있지 않아 비벼볼 만한 [[쇼다 코우조]], [[니시모토 다카시]] 등 일본 코치들은 2015-2016년 충돌 끝에 팀을 떠났다. 특히 2016년 쇼다 타격 코치와 함께 바바 토시후미 작전·주루코치, 오키 야스시 배터리코치 등 일본 코치진 전원이 사의를 표하고 직언으로 유명한 김재현조차 사의를 표한 걸 보면 당시 상황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이는 2017년 박종훈 신임 단장의 등장과 김성근 경질로 이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